연애/남녀 | 역사 속 유명 남창들 10人?



2025-04-27 12:50


역사적으로 성 노동자를 떠올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희들과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 나오는 빈곤한, “타락한 여성들” 같은 창녀들을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역할을 제공하며, 자신의 생계를 꾸린 남성 지골로(gigolo)들도 많았다. 이러한 남성 성 노동자들은 각기 그들의 연인들과 사회에 남긴 영향으로 유명해졌다.


존 솔






빅토리아 시대에 “dandy”는 언제나 최신 유행을 따르는 남자를 뜻했습니다. 많은 남성 매춘부들도 댄디였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사람들이 겉으로는 매우 점잖고 고상한 척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성적으로 대단히 개방적이었고, 은밀한 장소에서는 다양한 실험도 마다하지 않았다. 존 솔이라는 이름의 남성은 1800년대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난한 처지를 벗어나기 위해 남성 매춘부가 되었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고급 고객을 찾기 위해 런던으로 이주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담아 『The Sins of the Cities of the Plain; or, The Recollections of a Mary-Ann, with Short Essays on Sodomy and Tribadism』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 당시 남성 매춘부는 “메리 앤(Mary-Ann)”이라는 암호 같은 별칭으로 불렸다. 이는 남성들이 자신들의 남성 연인을 흔한 여성 이름인 “메리 앤”이라고 부르며, 의심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 책에서 솔은 정치 사회의 유력 인사들이 자신에게 성관계를 대가로 돈을 지불했으며, 심지어 집단 난교에도 참여했다고 썼다.

19 클리블랜드 스트리트(19 Cleveland Street)는 남성 전용 매춘 업소로 잘 알려진 주소였다. 책을 출간한 후, 존 솔은 책 속의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법정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내용은 부유한 집안의 아들인 마틴 오란모어 커원이라는 인물과 관련된 것이었다. 당시 동성 간 성행위는 불법이었지만, 그를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그를 기소하게 되면 동성애 행위에 가담한 수많은 다른 남성들까지 연쇄적으로 기소해야 할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다잇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돌았고, 게이 남성을 추적하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았다,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왕자도 클리블랜드 스트리트 19번지에 갔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존 솔은 자신의 성적 모험을 음란 문학 형식으로 쓴 책을 출간하고도 무사히 넘어갔다.


엘리스의 파이돈




엘리스의 파이돈은 초상화가 그려진 적이 없지만, 여기 소크라테스(오른쪽)와 젊은 그리스 병사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어떤 성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 느끼지만, 모두가 자발적으로 그 길을 택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나이 든 남성이 젊은 남성과 성관계를 맺는 것이 흔했으나, 이는 대부분 노예나 매춘부인 경우에만 허용되었다. 이 젊은이들은 대개 12세에서 20세 사이의 어린 나이였다.

엘리스 시에서 상류층 가정의 아들로 태어난 잘생긴 청년 파이돈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전쟁 중 포로로 잡혔다. 그는 아테네로 끌려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외모가 눈에 띄어 강제로 남성 매춘부가 되었다. 그는 여러 명의 남성 학자들 사이에서 성적 대상이 되었고, 결국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만나 친분을 쌓게 되었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에게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간청했고, 소크라테스는 그의 자유를 사주었다. 그들은 이후에도 친구로 지냈으며, 파이돈은 철학자가 되었고, 자신만의 철학 학파를 설립했으며, 자신의 사상으로도 잘 알려지게 되었다.


노애






사진이 찍히기 훨씬 전, 노애를 비롯한 사람들은



초상화를 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남겨진 기록으로만 그의 생김새를 알 수 있습니다. 영화 「시황제 암살」스크린샷


기원전 258년에서 238년 사이에 살았던 노애는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의 통치기 동안 활동했다. 당시 왕은 조정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으며, 어머니는 미망인이 되었다. 왕태후가 된 그녀는 공개적으로 연인들과의 관계를 즐겼으며, 과거에는 첩이었던 적도 있었다. 노애라는 남성은 훌륭한 체격으로 소문이 나 있었고, 왕태후 앞에서 스트립쇼를 선보였다. 그녀는 그의 외모에 매혹되어 그를 새로운 정부로 삼았다. 그는 궁에 들어가기 위해 변장을 해야 했지만, 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육체적 관계를 넘어서 정이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오랜 시간 관계를 유지했고, 자식도 두 명이나 낳았다.

기원전 239년, 조정은 어머니가 노애와 사귀며, 자식까지 낳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는 자신이 왕위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우려로 이어졌다. 노애는 왕이 자신을 좋게 보지 않는다는 소문을 듣고,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소규모 군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조정의 군대는 그들을 간단히 진압했고, 노애는 사지가 찢겨 죽임을 당했다. 그의 두 아들 또한 살해되었고, 그의 일가친척 모두가 몰살당했다. 조정은 어머니가 이 사실을 숨기고 자식들을 낳은 것에 분노하여, 그녀를 감옥에 가두었다. 시간이 흐른 후, 모자는 서로 화해했고, 왕은 어머니를 석방하며, 다시 삶을 이어가기로 했다. 기원전 221년, 조정은 중국을 통일하며, 최초의 황제 진시황이 되었다.


페보 디 포조




미켈란젤로의 이 그림은 남근처럼 생긴 물건들이 쌓여 있는 곳에 기대어 서 있는 알몸의 남자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화가이자 조각가 중 한 명으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와 다비드 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자주 나체 남성 모델들과 함께 작업했으며,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도 아무 이유 없이 수많은 나체 남성들이 등장한다. 일부 비평가들은 그가 너무 많은 나체를 공개적으로 드러냈다며, 그를 “신을 모독하는 자”라 불렀고, 특히 이 젊은 모델들을 사랑하는 남성들로 하여금 질투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나체 그림들은 성경 이야기와는 전혀 무관했지만, 미켈란젤로는 단지 남성의 몸을 그리는 것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분명했겠지만, 오늘날에는 그가 평생 동안 수많은 남성 연인들을 두었으며, 여성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었다고 말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미켈란젤로와 관계를 맺은 남성 성 노동자 중 한 명이 바로 페보 디 포조였다. 그는 미켈란젤로보다 훨씬 어렸고, 미켈란젤로를 마치 ‘슈거 대디’처럼 이용하며, 값비싼 선물을 요구했다. 미켈란젤로는 그에게 푹 빠졌던 것으로 보이며, 그를 “작은 공갈범”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공갈범’이라는 표현은 거칠지만, 실제로는 장난스러운 표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미켈란젤로는 그를 위한 시도 쓰며, 그를 사랑했던 것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끝내 그들은 헤어졌고, 미켈란젤로는 배신당했다고 썼지만, 구체적인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이미 금전 문제로도 요구가 많았던 그였기에, 그가 돈을 훔쳤을 가능성도 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지만, 역사 속에서 이런 관계가 기록으로 남아 있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허버트 헌크




앨런 긴즈버그가 촬영한 허버트 헌크의 사진

허버트 헌크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젊은 시절에는 마약에 빠지고 범죄자들과 어울리며, 삶을 망치기 시작했다. 그는 시카고에서 알 카포네를 위해 일했고, 자신의 방식대로 돈을 벌기로 결심하면서, 남창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39년, 그는 뉴욕으로 이주해 거리에서 몸을 팔았고, “42번가의 시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몸을 팔아 번 돈으로 마약을 샀으며, 비트 세대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잭 케루악과 친구가 되어 그에게 성매매 세계를 보여주었고, 케루악은 자신의 소설 『길 위에서』에서 '엘머 해셀'이라는 인물로 헌크를 모델로 삼았다.

헌크는 자신의 삶을 담은 책도 몇 권 출판했으며, 그 안에는 기이한 체험담이 가득하다. 그는 또 다른 작가 윌리엄 버로스와도 친구가 되었고, 버로스에게 마약을 소개했다. 버로스는 후에 『네이키드 런치』을 썼고, 이는 비트 세대를 대표하는 상징적 작품이 되었다.

1940년대에 헌크는 성적 지향 연구로 유명한 앨프리드 킨제이 박사를 만났다. 헌크는 자신이 몸을 파는 성노동자 커뮤니티의 일원으로서 킨제이의 연구를 도왔고, 스스로를 “킨제이의 포주”라 불렀다. 그는 정기적으로 약물을 주입하며, 자신의 몸을 위험에 노출시켰고, 절도죄로 5년간 복역하기도 했다. 거친 인생을 살아왔음에도, 그는 81세까지 장수했다.


장 주네




젊은 시절의 멋진 장 주네의 사진

장 주네는 1910년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매춘부였고, 그를 어린 나이에 버렸다. 그는 위탁가정에 맡겨졌고, 입양 부모는 그의 출생 사실을 알려주었으며, 가난하고 학대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그는 10살 때부터 도둑질을 시작했고, 16세에 소년원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는 많은 소년들이 동성 간의 성관계를 가졌고, 그는 그 경험을 즐겼다. 청년기에 출소한 그는 외인부대에 입대했지만, 가입금만 받고 도망쳤다. 이후 선원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시작했고, 절도와 마약 밀수도 계속했다. 성인 이후에도 여러 번 체포되었고, 수감 중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자서전 『꽃피는 노트르담』는 그가 젊은 시절 겪은 성매매 경험을 담고 있다. 그는 포주와 매춘부들의 이야기, 성적 환상, 심지어 살인까지 묘사하며, 이 책은 동성애 문학의 고전이 되었다. 이후 그는 여러 소설과 희곡을 발표했고, 이는 파리의 게이 커뮤니티에서 널리 읽혔다.

동시대 작가 장폴 사르트르는 주네가 어려운 유년 시절을 과장했다고 주장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주네는 미혼모에게서 태어났으며, 사랑 많은 농부 부부가 양육했으나 그가 나쁜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라고 한다. 진실이 무엇이든, 그의 다채로운 과거는 문학 작품에 풍부한 소재가 되었고, 그의 작품은 오늘날까지 읽히고 있다.


앤드루 커내넌






앤드루 커내넌

의 고등학교 졸업 앨범 사진은 마약과 술로 몸이 망가지기 전, 어린 시절 매우 잘생긴 모습을 보여줍니다.

앤드루 커내넌은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성공한 남창이었다. 그는 슈거 대디들로부터 아파트, 차량, 여행비 등을 전부 지원받았다. 천재적인 IQ와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그는 가족 중 막내였고, 가족의 자랑이자 기쁨이었으며, 명문 기숙학교에 다녔다. 그는 상류층 속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었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거짓으로 포장할 만큼 영리했다. 그는 필리핀 왕족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화려한 이미지 덕분에 많은 부유한 남성들이 그를 후원했고, 그는 호화로운 삶을 즐겼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허풍쟁이가 아니었다. 그는 나르시시스트이자 사이코패스였으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한 슈거 대디는 그에게 한 달에 $2,500 이상의 용돈과 고급 여행을 제공했다. 그러나 20대 후반으로 접어들며, 외모가 예전만 못해졌고, 후원자와의 관계도 끝났다.

고객이 점점 줄어들자 그는 분노했고, 27세에 전국을 떠돌며,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첫 두 희생자는 젊은 게이 남성이었고, 이후에는 성매매 고객이었던 중년 기혼 남성 두 명도 살해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게이 바에서 잔니 베르사체를 만나, 자신을 어디선가 봤다는 그의 말에 편승해 아는 척하며, 접근했다. 커내넌은 베르사체가 자신을 후원자로 삼을 수 있다고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최소 네 명을 살해한 뒤 마이애미로 향했고, 그곳에서 베르사체를 스토킹했다. FBI는 그가 베르사체와 친하다고 떠벌렸다는 친구들의 증언을 확보했지만, 가족들은 이를 부인했다. 쿠넌언이 베르사체에게 접근했다가 거절당하고 자존심이 상해 살해했다는 가설도 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베르사체를 살해한 뒤 호텔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제프 개넌




제프 개넌은 그의 본명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가짜였다.

1957년에 태어난 제프 개넌은 백악관 출입기자단에서 일하며, 성공적인 커리어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불독'이라는 이름으로 워싱턴 D.C.에서 남창으로 활동하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대머리에 키가 크고 근육질 체격이었으며, “군인” 이미지를 원하는 남성 고객을 상대로 일했다. 하지만 실제로 군 복무 경력은 없었다.

기자단 내에서, 개넌이 별다른 자격 없이도 대통령 기자회견에 출입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는 “탈론 뉴스(Talon News)”와 “GOPUSA” 소속이라 주장했지만, 이 매체들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블로그 수준의 사이트였다. 확인 결과, 그의 기사들은 대부분 백악관 보도자료를 복사한 것이었고, 이들 사이트는 부시 대통령 가족과 친분이 있는 텍사스의 바비 에벌를이라는 인물의 소유였다.

그의 자격 논란은 한 기자회견에서 “상원 민주당은 현실과 단절된 사람들인데, 대통령은 그들과 어떻게 협력할 생각인가?”라는 질문을 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이는 명백히 편향적인 질문이었고, 언론의 중립성 원칙에 어긋나는 행위였다. 이후 다른 기자들이 그의 배경을 조사하며, 그가 남성 성매매에 종사했던 사실과 누드 사진을 공개했다.

특히 아이러니했던 점은, 개넌이 보수적이고 때로는 동성애 혐오적인 논조의 기사를 작성하면서도, 실제로는 남성 고객과 성관계를 맺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의 이중생활이 드러난 후 그는 비판과 규탄을 받았고, 결국 기자직을 사임했다. 이후 『The Great Media War』이라는 책을 출간했지만, 그가 출입했던 매체들은 모두 폐쇄되었고, 애초에 그의 출입증은 위장된 블로그 덕분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덴햄 파우츠




데니 파우츠의 이 사진은 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푹 빠졌는지 보여줍니다.

1914년 플로리다주 잭슨빌에서 태어난 데니 덴햄 파우츠는 1920~30년대 가장 유명한 남창 중 한 명이 되었다. 젊은 시절 그는 트루먼 포티에게 엄청난 짝사랑을 품었는데, 카포티는 자신의 책 표지에 도발적인 사진을 찍은 바 있다. 당시 카포티는 24세였고, 공개적으로 동성애자였다. 파우츠는 카포티의 사진을 벽에 걸어두고 언젠가는 그와 함께할 날을 꿈꾸며, 지냈다.

덴햄 파우츠는 성장하여 뉴욕으로 건너가 부유한 고객을 상대로 일하는 남자 접대부가 되었다. 그는 굉장히 잘생겼으며, 남부 억양을 사용해 사람들에게 매력을 발산했다. 그는 이집트의 파루크 왕과 잠자리를 같이 했고, 그리스의 왕세자였던 파블로스와도 관계를 가졌다. 그는 금세 끊임없이 감싸지고 대접받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파우츠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돈을 벌어들인 뒤 룸서비스를 시키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힘든 일을 대신 시키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사람들은 그를 “kept boy”이라고 불렀다.

20세가 되던 해, 그는 뉴욕의 한 고객에게서 트루먼 카포티가 파리로 여행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 부유한 후원자는 파우츠의 짝사랑을 알고 있었기에, 파리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사주었고, 그는 마침내 카포티와 만날 수 있었다. 둘은 친구이자 연인이 되었지만, 파우츠는 아편 중독에 시달리고 있었다. 카포티는 그를 설득해 약물 재활 치료를 받게 했고, 치료가 끝나면 이탈리아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그러나, 카포티는 지인들을 통해 파우츠가 재활을 끝내지 않고, 곧바로 다시 아편을 피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카포티는 그와의 관계가 자신을 추락시킬까 두려워, 모든 연락을 끊었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카포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는 덴햄 파우츠를 모델로 한 여러 등장인물을 소설에 등장시켰다. 다른 예술가들 또한 그를 뮤즈로 삼았다. 그러나, 파우츠는 결국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파리에서 20대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샤이 샤하르




샤이 샤하르는 지골로로 은퇴하지 않고, 버레스크 클럽에서 공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샤이 샤하르는 1980년에 이스라엘로 이주한 미국인 남성이었다. 그는 팔레스타인 군대와의 연결고리가 필요했던 한 미국 다큐멘터리 감독을 만났고, 영어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들을 연결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그 대가로 영화 제작자 크레딧을 요구했고, 실제로 성공시켰다. 샤하르는 이렇게 영리하게 영화 프로젝트에 발을 들이게 되었고, 영화 완성 후 열렸던 여러 파티에도 초대받게 되었다. 그는 잔디밭 파티에서 한 부유한 여성을 만났는데, 그녀는 그에게 새 정장을 사주고, 현금을 쥐여주며, 남창 서비스 에이전시의 명함을 건넸다. 그녀는 그의 외모와 성격이 프로 지골로로서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샤하는 이미 35세였지만, 그는 한 번쯤 경험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500명 이상의 여성과 잠자리를 가졌고, 40쌍의 커플과 삼각관계에도 참여했다. 그는 첫 한 시간에 $150, 이후 한 시간마다 $100를 받았으며, 여성이 그를 다른 지역으로 초대할 경우, 시간당 $1,000와 추가 여행 경비를 청구했다.

암스테르담의 홍등가는 유리창 안에서 성매매 여성들이 고객을 기다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수십 년 동안 이곳에는 여성 성매매자들만 있었지만, 1990년대 초 샤이 샤하르는 역사상 최초로 유리창에 앉아 자신의 서비스를 제공한 남성 성매매자가 되었다. 그는 이성애자였기 때문에 여성 고객만 받았고, 대부분은 감정적 연결 없이 외도를 원하는 기혼 여성들이었다고 한다.

암스테르담에서 5년 동안 지골로로 일한 뒤, 샤하르는 더 이상 여성들을 개별적인 존재로 보지 않고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보게 된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이것이 매우 건강하지 않은 사고방식임을 깨달았고, 진정한 사랑과 정상적인 관계를 원한다면, 은퇴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는 결국 사랑에 빠져 결혼했고, 이후에는 버레스크 공연자로 활동하며, 오프 브로드웨이 뮤지컬 무대에도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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