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십 |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길러낸 군사학교들?



2025-08-11 08:36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가르친 군사학교는 생각보다도 여러 곳들이 존재함.
오늘은 이 학교들과 대표적인 졸업자들을 간략하게나마 훑어보고자 함.



1.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첫 순위로는 대한제국의 육군무관학교를 꼽을 수 있음.

1896년 개교해 1909년 폐교했고, 그동안 구한국군의 수많은 장교들을 길러내었음. 졸업자들 중에서는 1907년의 남대문 전투와 정미의병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한 이들이 다수 존재함.
보병조전, 전술학교정 등 무관학교가 편찬한 여러 교재들과 시스템들은 무관학교 출신 신흥무관학교 교관들을 통해 신흥무관학교로, 다시 광복군으로 이어졌음.

그 외에도 현대 한국군의 구령과 제식 등은 이때 육군무관학교에서 최초로 정한 것들이 독립군을 통해 국군으로 들어왔음

대표적인 졸업자는 김좌진, 김경천, 이갑 의사 등임. 특히 초창기 무장독립운동의 뼈대를 세운 이들 중 다수가 이곳 출신임



2. 신흥무관학교
그다음은 신흥무관학교임. 우당 의회영 선생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가산을 털어 만주로 이주, 간도에 세운 군사학교이자 민족학교임.

양규열, 양성환, 김좌진, 신팔균 등 대한제국군 출신 교관들이 교편을 잡고 많은 수의 독립운동가들을 길러냈고, 이들은 다시 1910년대 무장투쟁의 근간을 이루었음.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무장독립운동가들이 이 학교를 거쳐갔음. 독립운동인명사전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치면 관련 인물만 자그마치 211명이 나옴.

즉 한국 무장독립운동의 산실 같은 곳이라고 단언할 수 있음



3. 중국 윈난 육군강무학교
윈난강무당, 한국 독음으로 운남강무당이라고도 함. 청나라 말기 군제를 개편할 때 남서부의 윈난성에 세워진 군사학교임.

이 먼 곳까지 한국독립운동가들이 오게 된 계기는, 중국 윈난성 군벌 두목 탕지야오가 편의를 봐줬기 때문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신규식과 친했던 탕지야오는 한국인은 망국의 인민이 아니라면서 최소 2개 사단을 이끌 수 있는 수의 한국인 군관들을 양성해 주겠다고 약속했음.

대표적으로 임시정부와 광복군 계열 독립운동가이자 이승만 정부 시절 대한민국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이었던 이범석이 이곳을 나왔음. 역시 광복군 출신이자 한국전쟁 당시 활약한 이준식 중장도 이곳 동문임. 그외 여기 출신들은 최소 열 명이 넘어감

부속시설로 항공학교도 있었고 이곳을 졸업한 이들도 종종 있음. 대표적인 인물이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이자 독립운동가로서 한국 공군의 어머니로도 불리는 권기옥 여사임.

윈난 강무당은 그 외에도 동아시아사 전반에 영향력이 큰데, 중국 근현대 3대 사관학교이자 중국 전략가들의 산실 노릇을 함. 중국 인민해방군의 주더, 예젠잉 원수도 이곳 출신이고 베트남전 시절 베트남군 사령관 보응우옌잡도 동문임.



4. 중화민국 황푸군관학교
1924년 국민당이 북벌을 위해서 장교들을 양성하기 위해 광저우에 세운 사관학교임. 현대 대만 육사의 직접적인 전신이자 중국 근현대 3대 군사학교임.

1926년 여운형 선생이 장제스와 면담, 한국인 학생들의 입교를 허락받으면서 다수의 한인생도들이 입교했음. 독립운동인명사전 검색 결과 관련인물은 등록된 사람 중 74명이 존재함.

한국인 교관들도 많았는데, 훗날 홍군 쪽에서 활동하다 대장정 중에 전사한 김훈, 광복군에 가담하는 채원개 등이 있음.



5. 중화민국 뤄양군관학교
낙양군관학교라고도 함. 황푸군관학교의 분교라 정식 명칭은 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임.
1932년 이후 장제스의 지원을 받게 된 김구 선생이 예하에 한인특별반을 신설해서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을 길러냈음. 독립운동인명사전에는 76명이 관련자로 등록되어 있고, 바이두에서는 뭘 인용했는지는 몰라도 한국인 생도 415명을 양성했다고 설명함.
중국 학교였지만 한인특별반만큼은 김구와 김원봉이 뽑은 임시정부 계열 교관들이 한국사와 군사학을 가르쳤음.



여기서부터는 주된 곳은 아님

6. 중화민국 바오딩군관학교
베이징 근교 바오딩에 있는 사관학교임. 한국어로 읽어 보정군관학교라고도 함. 청나라 시절 양무운동의 일환으로 세워졌고, 이곳 역시 중국 근현대 3대 군사학교로써 명성이 높음. 수많은 군벌과 군인들이 여길 나옴

다만 약력이 좀 복잡한데 원래 바오딩군관학교는 1923년에 문을 닫음. 하지만 이후 후계 학교들과 항공학교 등이 바오딩에 세워졌기 때문에 광의의 의미로 바오딩 출신이다 하면 이들도 포괄함. 나는 일단 광의의 의미로 쓰겠음.

항공 쪽의 독립운동가들이 주로 나옴. 서왈보 의사, 그리고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인 최용덕 장군이 바오딩 출신임



7. 일본 육군사관학교
존나게 의외지만 일본육사 출신도 있음. 침략자들의 학교이긴 해도 일단은 당대 동아시아 최고의 군사교육기관이었으니까.

대한제국 칭제 직후부터 많은 군인들을 군사 유학보냈던 기록이 있음. 또한 육군무관학교가 폐지된 후 남은 생도들은 일본육사에 편입되었음.

물론 이들 대부분은 경술국적 이병무 그새끼처럼 친일 부역자의 길을 걸었지만, 일본육사를 나오고도 그 지식을 살려 민족중흥에 뛰어든 인물들도 종종 있음.

대표적으로 이갑, 노백린, 유동열 등은 극초기에 유학하고 돌아왔기에 대한제국군에서도 계급이 상당히 높았지만, 일본에 협력을 거절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듦.

한편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자 나중에 제헌 국회의원이 되는 지청천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가 일본육사로 편입, 일본군에 임관한 직후 탈영해 독립운동에 가담했음.



8. 중국 구이저우 강무학교
귀주강무당이라고도 함. 중국 서남부 구이저우성에 있었음. 구이저우 군벌군의 사관학교임.
1910년대에는 훗날 장제스의 최측근으로 올라가는 인물인 중화민국 행정원장 허잉친이 일본육사를 다녀와 교장으로 있었음. 그 외에는 일본인 교관도 있었음.

그리 유명한 군관학교는 아니고, 그렇게 두각을 나타내지도 못했던 학교임. 하지만 한국독립운동가 중에선 딱 한 명, 임시정부를 물밑에서 지원하고 훗날 한국전쟁 당시 지연전을 총괄한 김홍일 중장을 배출함.

그 외 이곳 동문들이 이끈 중국 국부군 제102사단은 김홍일과 함께 중일전쟁 초반에 활약했음.



9. 프랑스 생시르 사관학교
유서깊은 프랑스군의 사관학교임. 저번에 썼듯이 이 학교 군사교범이 대한제국군 전술학교재 편찬에 쓰이기도 했음.

단 한명, 헤이그 특사의 이위종 선생이 이곳을 나왔음. 1900년 대한제국 정부의 요청을 프랑스군이 받아들여 입학시켜 주었음.
이위종은 이곳에서 쌓은 군사지식을 바탕으로 경술국치 후 러시아 제국군, 그리고 볼셰비키군에서 맹활약하게 됨



10. 미국 버지니아 군사대학
웨스트포인트와 함께 미국 군사학교의 쌍벽을 이루는 그 사관학교임.

단 한명, 이복원 선생이 이곳을 나왔음. 이복원 선생은 1902년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대한제국군의 군사학교들의 교관으로 복무하다 경술국치를 맞았고, 이후사비를 털어 미국으로 가서 40대의 나이에 버지니아 군사대학에 입학함.

졸업 후에는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광복군에서 복무하며 군사교범을 편찬하기도 했음. 미국 유학파라 별명이 빌리였다나.



그 외에도 이런저런 학교들이 눈에 띔.
고려인 출신의 한창걸은 우크라이나 키예프 군사학교를, 홍군 계열의 김훈은 신흥무관학교와 윈난강무당을 수석졸업하고 모스크바 육군보병학교에서 수학하기도 했음

그리고 김홍일, 최용덕, 박시창 장군 3명은 중화민국 육군대학에서 고급 군사교육을 추가로 받기도 했음. 김홍일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그라드 전투랑 북아프리카 전역에 참전한 소련군/영국군 지휘관들이 직접 와서 강의도 했다나.

출처
독립운동인명사전
민족문화대백과
위키백과
바이두
대륙의 분노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육군사관학교: 그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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